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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산 - 삶은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다

by 주식대박 2023. 11. 7.

인생의 두 번째 산에 오른다는 것은 고통의 계곡을 자기 발견과 성장의 계기로 삼는 것이다. 계곡은 고통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낡은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고통이 자기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똑똑히 바라볼 때, 그렇게 자기 인생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성공이 아닌 성장을, 물질적 행복이 아닌 정신적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고뇌의 계곡에서 사막의 정화를 거쳐 통찰의 산봉우리에 이르는 것이다.

데이비드 브룩스 (지은이), 이경식 (옮긴이), 부키 (출판)

두 번째 산으로 오르다

톨스토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첫 번째 산에 오른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자신이 바라던 소설가가 되었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성공을 거두었다. 그 결과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한 작품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인생이 그에게 시련을 안겨 주었다. 맏형 니콜라이가 서른일곱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한 것이다. "인생이 부조리하고 쓸모없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톨스토이는 인생에 신물을 느꼈으며, 인생에서 그 어떤 의미 있는 것도 찾지 못했다. 그는 인생의 계곡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인생이란 두 개의 산을 오르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첫 번째 산에서 우리 모두는 특정한 과업을 수행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재능을 연마하고, 자신의 족적을 세상에 남기려고 노력하는 일 등이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일이 벌어진다. 누군가는 첫 번째 산의 정상에 오르지만 아무것도 만족하지 못한다. 또 누군가는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호된 실패의 시련을 겪는다. 이들은 모두 당혹스러움과 고통스러움의 계곡에서 헤맨다. 두 번째 산을 오른다는 것은 이 계곡을 자기 발견과 성장의 계기로 삼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계곡은 고통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낡은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고통이 자기에게 가르치는 내용을 똑똑히 바라볼 때, 그렇게 자기 인생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성공이 아닌 성장을, 물질적 행복이 아닌 정신적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계곡의 고뇌로부터 사막의 정화를 거쳐 산봉우리의 통찰에 이르는 것이다." 계곡에 떨어진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의 시기는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드러내며, 자신의 생각하던 모습이 사실은 진정한 자기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이 계곡은 자기 발견과 성장의 계기가 된다. 고통의 시점은 일상에 피상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을 방해해서, 자신의 좀 더 깊은 내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자기 깊숙한 곳에 보살핌의 본질적인 어떤 능력, 즉 자아를 초월해서 타인을 보살피고자 하는 어떤 열망이 있음을 깨닫는다. 스마트폰 시대에는 어떤 거래나 인간관계를 맺거나 깨는 데 들어가는 비용인 마찰 비용이 0에 가까워진다. 인터넷은 당신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클릭해서 시험적으로 사용해 보라고 권한다. 온라인에서 산다는 것은 흔히 전환상태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실질적으로 어떤 것에도 깊이 몰입하지 못한다. 온라인 인생은 헌신의 결단과 몰두를 가로막는 온갖 장치들과 기기들로 가득 차 있다. 만일 당신이 30초 동안만이라도 주의를 집중할 수 없다면, 당신은 과연 어떻게 인생을 위해 무언가를 수행하고 헌신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 산으로 향해야 하는 이유

"인생에는 두 개의 산이 있다"라는 저자의 비유를 받아들이면 두 번째 산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첫 번째 산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기 인생의 목표와 지향이라면, 두 번째 산의 무게중심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첫 번째 산이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것이라는 구분이 그 차이를 잘 짚어준다. 《두 번째 산》 에서는 두 번째 산의 의미를 체계화하고 다양한 실례를 통해 두 번째 산 오르기를 보여준다. 물론 그의 의도는 많은 독자가 그의 견해에 공감하고 두 번째 산 등정에 동행하는 것이다. 우리와는 차이가 좀 있겠지만, 저자가 진단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은 초개인주의 문화의 팽배에 있다. 그의 판단에, 초개인주의 문화의 발흥은 1960년대에 시작됐다. 바로 전시대까지 미국사회는 여전히 권위에 대한 존중이 강요됐으며, 개인보다는 조직과 집단이 우선시됐다. 하지만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두한 새로운 반문화(카운터컬처) 운동은 나는 자유다를 새로운 도덕 생태계의 구호로 탄생시켰다. 이에 따라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해방된 개인과 개인주의 라이프 스타일이 칭송됐다. 그렇게 반세기를 거치면서 개인주의 문화는 초개인주의 문화로까지 진화했는데,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 개입하려 한다. 개인주의 문화가 그토록 예찬하는 자유가 과연 인생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가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치명적인 결함은 그것이 아무런 방향성도 갖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정치적 자유는 위대하지만, 그 확장판으로서 개인적, 사회적, 정서적 자유는 완전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이러한 자유주의와 함께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은 능력주의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능력주의는 공동체를 각 개인이 서로 경쟁하는 집단으로 규정한다. 개인의 권리가 공동체적 가치나 덕목보다 우선하며, 자연스레 공동체적 유대는 파괴된다. 서로가 남들보다 더 잘나고 싶어 경쟁에 몰두하지만, 이 경쟁은 어느 순간 무의미해진다. 개인의 해방은 한편으로 우리를 공동의 삶으로부터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저자 브룩스는 이제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또 다른 반란이라고 말한다. 개인주의 문화가 전시대의 획일주의에 대한 반란이었다면, 두 번째 산으로 비유되는 두 번째 반란은 이 반란에 대한 반란이다. 개인주의가 행복의 추구를 지상의 가치로 간주한다면 두 번째 산에 오르는 이들은 인생의 의미와 도덕적 기쁨을 추구한다. 행복이 자기만족의 상태라면 기쁨은 자기 초월의 상태와 연관된다. 자기만의 관심에 갇혀 있다면 기쁨을 경험할 수 없다. 두 번째 산의 세계는 자기도취적 세계에서 빠져나와 타인들과 함께할 때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기쁨의 세계다. 첫 번째 산이 개인주의적 세계관과 연결된다면 두 번째 산은 관계주의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다. 개인주의와 그 진화적 형태로서 초개인주의는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삶에 이르게 할뿐더러 타인과 인류 전체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약화시킨다. 브룩스가 제안하는 관계주의는 그것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지 간에 지속가능하면서 더 나은 문명으로 나아가려는 희망을 우리가 놓치지 않는다면 진지하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에겐 함께 하는 삶이 필요하다

지금은 개인의 시대다. 혼밥, 혼술 등 혼자의 용어가 늘어난다. 일인가구가 늘어나고 남들과의 관계를 부담스러워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언택트 시대로 접어들며 개인주의 추세는 더욱 거세져간다. 고독사가 늘어나고 외로운 이는 더 외로워가는 팬데믹은 우리의 이웃을 더 소외시켜 간다. 코로나 확진이 개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확진자에게 혐오와 비난이 가해지고 각종 혐오가 더해진다. 이 사회는 과연 대안이 있을까? 《두 번째 산》은 바로 개인주의 시대가 만들어낸 이 시대를 극복해 내기 위한 대안으로 '함께'라는 단어로 회귀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의 인생관, 자아 성취와 부와 물질성취에 대한 인생관에서 헌신, 진정한 기쁨, 함께라는 산을 오를 것을 요구한다. 첫 번째 산이 성공이라는 개념이라면 두 번째 산은 자신을 내려놓고 함께 걷는 것을 뜻한다. 대게 많은 사람이 첫 번째 산을 동경한다.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성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첫 번째 산을 오르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다. 하지만 이 첫 번째 산에 오래 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 한 번씩은 위기를 겪으며 전환점을 맞기도 한다. 저자 데이비드 브룩스는 바로 이 첫 번째 산에서의 위기를 계곡에서 떨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시련과 고통이 두 번째 산으로 나아갈 수 있는 관문이고 나아갈 때라고 강조한다. 앞에서 말했듯 첫 번째 산은 개인주의, 나만의 성공이 중요한 사회이다. 예전, 인기 예능프로그램에서 외치던 "나만 아니면 돼"라는 구절은 이 개인주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 말이 바로 현 사회를 보여준다. 무조건 첫 번째 산을 오르기에 바빴던 지금 우리의 모습을 통해 저자는 텔로스(목적) 위기라고 말한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목적이 없이 무작정 걷거나 잠자는 상태로 사람들은 살아가는 이 위기는 외로움, 불신, 의미, 부족주의 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이 위기 속에서 저자는 인생의 목적을 재정립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먼저 첫 번째 산, 개인주의가 만들어낸 성공의 목적은 이미 효과가 없음이 입증되었다. 자살이 늘어나고 공동체가 단절되었다. 그렇다면 대안은 바로 두 번째 산을 옮겨가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을 타인에게 양보하고 자신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열린 상태로 만들어 헌신할 수 있게 만드는 '함께'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두 번째 산이란 스스로 법적 또는 서약으로 책임의 구속 안에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가령 결혼에 대해서도 혼인신고를 통해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겠다는 서약과 함께 책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회사에서 주고받는 계약의 관계가 아닌 책임을 약속하는 구속으로 스스로를 헌신의 길로 밀어 넣는 삶을 뜻한다. 이 헌신에 대해 저자는 직업, 결혼, 철학과 신앙, 그리고 공동체 네 가지 헌신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가 이 네 가지 분야에서 말하는 헌신에서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바로 이들을 목적이 아닌 관계의 대상으로 접근성이다. 가령 첫 번째 산의 개인주의는 서로의 목적이 되기 위하여 결혼한다. 하지만 개인과 개인으로는 둘이 되지 못한다. 저자는 역으로 자기를 버리고 초월할 때 결혼 생활이 지속될 수 있다.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기쁨으로 시작된 결혼이 결국 둘이 하나가 되어 가는 배움의 현장임을 알아가며 끊임없이 서로를 위해 재결단해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부부 사이의 재결단이 필요함을 강조하는데 전문가들이 부부 사이의 궁극적인 해결책이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말라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완전한 해결책은 없다. 다만 부부가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것에서부터 재결단은 시작된다. 재결단을 하는 방법에서 전문가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그것은 바로 결혼 생활에서 커다란 의견 불일치가 있을 때 이 문제를 말끔하게 풀어 줄 어떤 궁극적인 해결책이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재결단은"우리 오후에 함께 산책할까?" "당신은 쉬어. 청소는 내가 할게"와 같은 실천을 할 시간이다. 공동체의 위기는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돌봄 또는 공동체의 많은 일들이 이미 시장에 넘겨져 이익 대상이 되었다. 예전 아이를 돌아가며 돌보아주던 육아는 순전히 엄마 또는 어린이집의 영역으로 넘어갔고 노인 돌봄 또한 요양원이 대신해 주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개인주의가 미국의 총기 난사 주범의 주요 원인임을 지적한다.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서 저자는 개개인을 주력하기보다 이웃 단위의 변화를 추구할 것을 제안한다. 마을 전체를 바꿀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길은 개인 단위가 아닌 이웃 단위로 복원을 시도해야 한다. 또한 공동체 복원의 시작이 이 사회의 가장 소수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시작됨은 지금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두 번째 산》은 자신을 내어줌으로 '함께'하는 삶을 얻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제 두 번째 산을 오른 사람들의 예시와 그들의 사는 방법을 통해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책이다. 초개인주의 절정을 달리는 지금, 이 시대는 어쩌면 역행하는 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개인주의가 초래한 많은 외로움과 문제들을 보아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은 다른 대안이 되어 줄 수 있다.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변화를 낳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독자들도 헌신을 통해 더 큰 유익과 공동체를 낳을 수 있다고 초청하는 책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우리에겐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이 필요하다. 팬더믹 시대에 우리에겐 서로에 대한 헌신이 필요하다. 혐오를 이겨나갈 수 있고 더 큰 외로움을 막아낼 수 있다. '함께' 하는 두 번째 산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